밀가루 졸업식.
졸업시즌이 다가왔다며 밀가루를 뒤집어쓴 학생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을 못해봐서 괜히 심술을 부리는것인지도. 그렇지만 밀가루를 봉지채 머리위에 쏟아붓는것을 보면서 나는 웬지 즐겁다는 느낌보다는 저 귀한 밀가루를 버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새하얀 밀가루를 봤는데 웬지 내 머릿속에는 아프리카에서 배굶고 있는 흑인 아이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저 밀가루 한봉지면 그 아이가 얼마나 행복해할까, 그리고 그 아이의 엄마는 얼마나 그것을 감시히 여길까 하는 그런 생각과 함께 말이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졸업식날에는 으례히 밀가루로 축하를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왜 하필 밀가루일까? 대학을 가지 않는 학생들이 많아 일부러 성대하게 치른다는 미국 고등학교의 졸업식도 그렇게까지 축하하지는 않는것 같다. 학사모를 하늘로 던지는 그정도?로 졸업을 축하하고 그들은 그것을 최고의 축하의식이라 여기기도 하는것 같다.
왜 하필 밀가루일까? 다른 방법으로는 축하하면 안되는 것일까? 어차피 버려질 밀가루라면 졸업식 전에 자신이 축하해주고 싶은 친구, 그러니까 자신이 밀가루를 사서 머리위에 뿌려주고 싶은 아이의 이름으로 밀가루 한봉지씩을 기부하는것은 어떨까? 그렇게 학교에서 모아진 밀가루는 꼭 아프리카까지 보내지 않더라도 국내에 있는 이웃을 돌보는데에 써도 좋을것 같다. 말로만 철거민과 같은 약자를 위해야 한다 하기보다는 직접 약자를 돌보는 기부와 봉사활동으로 졸업을 축하하고 사회에 첫발을 딛는것이 더 의미있지 않을까?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위선적인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들 보다는, 모여진 밀가루로 빵을 만들든 수제비를 끓이든 졸업식날이나 그 전날에, 그 누구도 봉사활동 점수를 매기지 않는 그때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학교주변에 있는 노인정이나 모자원에서 음식과 정을 나누는 그런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학교에서도 수학과 과학 그리고 영어 등 가르칠수 있는 학문은 다 가르쳤다 하여 졸업을 시켜주는 것이니 마지막으로 이웃을 돌아볼줄 아는 마음이야 말로 학교가 가르칠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자 가장 중요한 삶의 지침이지 않을까? 학생들에게도 그러한 따듯한 졸업식과 졸업 축하야 말로 평생 기억에 남는 학창시절의 꽃이 되지 않을까?
어느덧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는 우리나라도 이제는 우리가 누리는 풍요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 못할정도로 풍요로움에 무감각해져 버린것 같다. 친구의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 밀가루 한봉지를 쓸수 있다는 것. 불과 50년전만해도 쉽게 상상할수 있는 일이었을까?
친구의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 으례히 남들도 다 하는것이라 뒤질수 없으니 남들보다 더 ‘티’나게 일종의 ‘테러’를 저질러 주고 즐거워하는 것 보다는 밀가루 한봉지. 하찮게만 여길수도 있는 밀가루 한봉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칠흙같은 어둠을 밝혀주는 단 하나의 등불이 될수 있다는것. 그것을 배우고 나눔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에 자리잡아야 할 ‘졸업식 문화’이며 ‘관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부를 욕하는 사람들.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잘못보고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반가울것 같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한국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거의 대부분의 블로그, 한국 사람들이 블로깅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정부를 욕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어서 속이 뒤집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갈고리 같이 생긴 눈과 마음으로 시시각각 트집잡고 물고 늘어지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자하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복잡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것만 같다. 사람 마음이 그리도 꼬부라져 있으니 어찌 편협해지지 않고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런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꼬부라진것이 오히려 정상인것만 같은 세상이 되어가니 참 큰일이다.
한두명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것은 때로는 무시하거나 생각을 바로 잡아줄수 있지만, 집단적인 생각이 잘못되어 있을 경우에는 상당히 위험하고 바로잡기도 힘든것이 사실이다. 책 National Delusion도 역시 그것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사고가 편협해지니 조금만 더 생각하면 자신이 하는 말도 역시 자신이 내세우는 이유나 논리로 금새 반박당할수 있다는것 조차 생각을 못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조각상의 한쪽면만 보고 이야기 하고 있으니, 조각상을 제대로 이해할수 없는것이며 다른 한쪽면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것이다.
건전한 비판은 언제든지 좋다고 생각하지만 편협한 사고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은채 피상적인 이유만을 내세워 달려들고 비난하려 드는 습관은 하루빨리 버리는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조각상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다양한 각도에서 조각상을 바라본 다음에 이야기 하고, 글이 적힌 종잇장을 받아들면 앞면과 뒷면을 읽어보고 이야기 하는 습관을 기르는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습관이 몸에 벤다면 그들의 일상생활 역시 좀더 행복해질테니 말이다.
싸이코 패스?
7명을 살해 했다고 하는 강호순은 연일 매스컴에서 싸이코 패스의 기질을 보인다고 보도되고 있다. 싸이코 패스. 한마디로 비정상적인 정신질환자 라는 말인데, 웬지 모르게 느낌이 찝찝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중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그리고 ‘인권’을 존종하는 미국에서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른것으로 판가름나면 교도소로 가지 않는다. 대신 정신병원에서 정신치료를 받고 ‘나온다.’ 맞다. 정신병원에서 평생 갇혀사는것이 아니라 ‘나온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안될법한 범죄자들은 제정신이 아닌 척 연기를 하면서 정신질환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른것이라며 재판부에 사정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미국에서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를 인정받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런 방법으로 정신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나온 범죄자는 아직 매스컴에서 다루어지지 않은것 같다. 그렇다면 강호순이 그 첫번째가 될수도 있을까? 나는 그럴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라면 제정신으로 범죄를 저지른것이 아니니 정신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날것 같다.
그런데 정작 내 느낌이 찝찝한 이유는, 이것 모두가 강호순의 작전 또는 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어서다. 강호순은 바보가 아니다. 절대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가 처음 붙잡혔을때 차량을 불에 태운것 외에 컴퓨터 하드 디스크를 포맷했다는 기사 내용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경찰이 왜 데이터 복구를 하지 않는것인지, 왜 그런 소식은 없는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강호순은 경찰 조사에서는 당당하지만 일반 대중 앞에 나설때에는 또다른 모습을 보이는 지능적인 수법을 쓴다고 한다. 그것만 보아도 강호순은 치밀한 지능범이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것이다.
강호순을 싸이코 패스로 몰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짐작하는 것이 맞다면 그는 정신질환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것이 아니라 멀쩡한 정신으로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강호순은 지금 자기가 싸이코 패스라 불리는것을 즐기고 있는것 같다. 그러니 책을 쓸 생각을 하고 그 책이 잘팔릴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에 자식에게 인세라도 물려주겠다 하는것이 아닐까 싶다.
강호순의 외모에 속았던 피해자 처럼, 강호순의 검은 의도에 모두가 속아넘어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티스토리 블로그 개설.
드디어는 티스토리 블로그를 하나 개설했다. 새로운 category를 만드느니, 아예 블로그를 하나 새로 개설해버렸다. 진절머리가 나서 떠너온 티스토리에다 블로그를 개설한 이유는,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는 사람도 있는것 같아보이기도 하고 또 솔직히 여러모로 티스토리가 약간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워드 프레스는 3GB의 무료 저장공간을 제공하고 광고게제는 차단시키지만, 티스토리는 무제한 저장공간에다 광고게제도 자유자재다. 아, 그리고 티스토리는 무료로 스킨과 CSS파일을 내 마음대로 수정할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티스토리로 가야겠다고 결정한것은 category 정렬방법이다. 워드 프레스는 category 정렬 순서를 사용자가 정할수 없는 반면, 티스토리는 편리하게 해 놓지는 않았지만, 사용자가 순서를 정할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렇게 이점이 많은 티스토리이긴 한데, 그래도 부족한것이 없는것은 아니다. 브라우저에서 글쓰는 에디터가 쓸만한게 없다. 티스토리에서는 두가지 에디터를 쓸수 있는데, 둘다 쓰기 불편하다. 글하나 쓰려면 거의 ‘삽질’을 해야 하는 수준이다.
Tok도 워드 프레스를 기준으로 만들어 놓은 탓에, 티스토리와는 잘 맞지도 않는다. Tok을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티스토리 블로깅을 할텐데 손을 대기가 싫으니 참 큰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내가 생각하는 일상을 블로그에 다 기록하지 못함을 최근에 자각했다. 그래서 블로그를 하나 더 꾸릴까, 아니면 이곳에 또다른 category를 만들어 포스팅을 할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따로 블로그를 하나더 꾸릴것인가 하는 문제는 솔직히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여기다 해도 좋고 따로 하나를 더 만들어도 좋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작 힘든일은, 이름 붙이는 일이다. 새로운 블로그를 만들든 만들지 않든 지금 내가 블로깅 하려는 것들을 넣어둘 category명을 무엇으로 해야할지 상당히 고민스럽다.
나는 항상 이름을 지을때가 되면 고민한다.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새로운 객체를 만들때에도, 새로운 함수를 만들때에도 이름을 무엇으로 해서 붙일까 상당히 고민한다. 부끄럽지만 어떤때에는 실제 코딩하는 시간보다 이름을 뭘로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이름 붙이는것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쓴다.
내가 원하는 이름은 누가 봐도 한눈에 무엇인지 알아볼수 있는 그런 단어.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줄수 있는 그런 단어나 문구다. 그러면서 아래위 category나 객체와의 상관성까지 고려해야 하니… 쓰고 보니 좀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는 있는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이름 붙이기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프로그래밍을 할때에는 코드를 나눌때 다른사람을 위해서도 이름 붙이는데 신경을 써야한다 하지만, 내가 이름때문에 고민하는 이유는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유다.
나에게 이름을 붙인다는것은 내가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유지해 나갈것인가를 결정하는것과 같기 때문이다. 적절한 이름을 붙여놓는다면 항상 그 이름을 볼때마다 처음 내가 계획했던 그 취지를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알수 있을테니 적절한 이름붙이기는 나에게 상당히 중요한것이다.
이렇게 이름붙이기에 힘들어 할때마다 하는 생각이 있다. 도대체 내 아이 이름은 어떻게 붙일까? 하는 것인데, 내 이름을 붙여준 부모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작명가는 지금 내가 하는 이런 고민정도는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모르겠다. 사람의 이름은 이름일 뿐 그리 중요한것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사물이나 사물을 분류하는 이름은 이름 그 자체로서 그것의 성질이 판가름 나는 만큼 상당히 중요한것 같다. 이름붙이기. 이것이야말로 아마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아닐까?
범죄자 또는 범죄 용의자와 인권.
조선일보 만평을 보면서 인권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봤다. 혹자는 multi-species 라는 말을 하며 인간이 아닌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실 범죄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권이 없다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강호순은 이미 범죄를 자백했으며 현장 검증까지 마친 사람이다. 그러나 ‘인권’과 ‘법’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아직까지는 선고가 내려지지 않았으니 백번 양보해서 살인범이 아닌 살인 용의자로서 생각 해봤다. 살인 용의자 강호순도 인권이 있으니 얼굴공개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의견에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인권이라는게 무엇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UN 인권 공동 선언문 1조는 다음과 같다.
All human beings are born free and equal in dignity and rights. They are endowed with reason and conscience and should act towards one another in a spirit of brotherhood.
보다시피 인간은 자유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자유. 인간은 생각의 자유, 거취의 자유, 그리고 발언(이 경우에는 언론보다는 ‘발언’이 나을것 같다)의 자유 등 여러가지 자유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러한 자유는 항상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호순의 얼굴공개를 놓고 얼굴공개는 곧 인권침해, 또는 초상권의 보호는 인권존중 이라는 공식을 내세우는 의견에 또다시 의문이 생긴다. 이미 법과 경찰이 침해하고 있는 강호순의 인권, 초상권을 보호해야 한다며 무슨일이 있어도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당신마저도 간과하고 있는 인권 침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실을 똑바로 보자. 강호순은 경찰에게 붙잡히는 그 순간 그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박탈당했다. 가장먼저, 강호순은 거취의 자유를 빼았겼다. 경찰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하며, 자신이 가고자 하는곳에 가지 못하고 있고자 하는곳에 있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법이 지정하는 구역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그는 분명히 인권을 침해 당하고 있다. 강호순은 생각의 자유도 빼았겼다.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생각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고 경찰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고통을 받고 있는만큼 확실히 그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 몇가지를 박탈 당했다.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아야 할’인권’이 침해당했다. 이것이 옳은것일까? 아직 선고 받지도 않은 범죄 용의자의 인권을 너무 심하게 침해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인권을 침해하면서 까지 유치장에 가둬둬야만 하는것일까? 불구속 수사도 있지 않는가? 아니, 경찰이 사람을 불러놓고 꼬치꼬치 캐 묻고 대답하라 하는것도 인권 침해이니 그를 그냥 가만히 놔둬야 그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범죄와 범죄의 경중을 따져 볼때 강호순과 같은 사람은 거취의 자유나 생각의 자유에 대한 인권 침해 정도는 정당하다 생각한다면, 과연 범죄 용의자의 인권침해를 정당화 시키는 ‘수위’는 도대체 누가 정하는것인지 또다시 되묻지 않을수가 없다.
강호순의 얼굴 공개를 놓고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람들 마저도 강호순의 구속 수사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는 못할것이다. 이미 강호순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면서 ‘어떤 경우에도 인권은 보호해야 한다’며 떠드는 그들은 정말 위선자가 아니라면 바보가 아닐수 없다. 강호순의 얼굴 공개와 인권 논란은 범죄자나 범죄 용의자의 인권침해의 수위가 어디까지가 적절하느냐의 논쟁이 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인권을 침해 하느냐 존중하느냐의 논란이 일고 있으니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든것이다.
알만한 사람은 이미 깨달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권존중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는 공익이다. 쉽게말해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잘살자는 뜻을 기초로 하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을 해치는 살인범은 특정한 장소에 잡아 가둬두기도 하고, 살인 용의자는 위험하다 하여 구속수사를 하기도 하는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강호순의 얼굴 공개가 모두 함께 행복하게 잘 살수 있도록 하는데에 기여하는 행동인가 하는 문제이며, 그리고 분명 이견은 있겠지만 나는 범죄자의 평범한 얼굴을 공개함으로서 얻어지는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 그리고 흉악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잃게될 인권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올 그의 얼굴 공개가 공익의 목적을 충실히 실현시킨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것이다.
승리의 조건: 침착함.
수차례 도발을 암시하는 ‘협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다급해진것일까. 북한 노동신문은 경고를 외면하면 군사충돌이 이어질수 있다며 또한번 ‘협박’을 했다한다. 사실 나도 놀랬다. 군사 경계태세를 높인것은 당연한 조치겠지만, 살인 사건 때문인지 신문에서도 북한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고, 주가도 환율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듯 해서 말이다.
북한의 전쟁시사 발언 중 가장 기억에 남는것은 단연 ‘서울 불바다’ 다. 당시 기억으로는 신문에서 대서 특필을 하고 경제에도 꽤나 악영항을 끼친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일 이후로 우리나라는 가급적이면 북한이 전쟁 발언을 하지 않도록 잘 ‘돌보는’ 방법을 택했는데, 햋볓정책의 영향으로 심지어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도발과 요구에 어쩔줄 몰라 쩔쩔 매는 단계에까지 갔었던것이 아니였나 싶다.
사실 북한이 저렇게 ‘협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불편하기 그지 없는 것이지만, 이제서야 정상적인 원상태로 돌아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아이를 감당못해 쩔쩔 매는 상황이 아니라, 어른이 어른답게 아이를 다루는 상황으로 돌아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북한의 ‘협박’은 너무 잦았다. 그리고 항상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협박’을 해왔었던 만큼 이제는 더이상 그들의 ‘협박’이 통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협박’을 하고 전쟁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지만 아무일 없었고 그들은 매번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 전쟁 발언을 하는것이므로 크게 신경쓸 필요없다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조성된것 같다. 남한내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북한의 전략에 동요하지 않는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정말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양치기 소년에게도 늑대는 찾아왔듯이 북한이 실제로 도발할 가능성도 무시해서는 안될것 같다. 물론 군인들은 경계태새를 강화하고 철저히 준비하고 있겠지만, 국민들 역시 언제든 전쟁을 치를 마음의 준비를 하는것이 좋을듯 싶다. 그렇지 않으면 막상 크던 작던 교전이 일어났을때에 겪는 충격과 혼란은 여차하면 전면전을 치루어야 할지도 모를 우리나라로서는 큰 짐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케냐에서는 무료로 배급하는 연료(fuel)을 받기위해 우왕좌왕 질서없이 달려들다가 연료에 옮겨붙은 불로인해 111명이 사망하고 20명이 사상했다 한다. 전쟁이든 사고든 어떠한 경우에도 침착하지 못하고 패닉(panic)하는 순간 불의의 사고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국민들 스스로 한번쯤은 머릿속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두어서 만일의 상황이 오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할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도 좋을듯 싶다.
말빨 좋은사람.
인터넷이 이렇게 해서 발달한것일까. 링크를 따라 다니다 보면 끝없이 읽을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블로그 “Open Sauce“에서 “급진적 생물학자 Radical Biologist” 또다시 거기서 “임시연습장” 으로 옮겨가며 글을 읽어댔으니 말이다.
세개의 블로그 중 내 눈을 끌었던 것은 “급진적 생물학자 Radial Biologist”였다. 어떤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싶어 글을 읽어보았더니, 기대와는 다르게 별 내용은 없었다. 뭐랄까, 할 말이 많아서 길게 써 놓은것이 아니라 한두마디로 압축할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길게 써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아무튼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듯한 노력이 상당히 보이는, 그래서 복잡하게만 쓰여진 글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간단히 말해서 자연과학은 학문의 성격상 객관성(objectivity)을 확보하기 쉬운 반면 사회과학은 그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객관성을 확보할수 있기에 자연과학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을때 그것이 받아들여지기가 쉬운반면 사회과학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구나 알만한 이 사실을 애써 포장해서 말하고 있는 ‘급진적 생물학자’의 말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옳은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리학의 중력과 원심력, 그리고 그 유명한 (미)생물학?의 파일로리균의 발견은 자연과학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프레임 뒤집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이 아닌 언어학 분야를 보면 아기의 언어 습득과정에 대한 스키너의 주장을 뒤집어 엎은 촘스키의 발언은 엄청난 관심과 함께 빠르게 학계에서 받아들여졌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들기에 프레임 뒤집기가 어렵다는 ‘급진적 생물학자’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급진적 생물학자’는 용어에서도 상당히 뒤쳐지는 지식수준을 보여주고 있는데, 영문으로 말해놓은 두가지, ‘양(quantity)’과 ‘조작(operation)’이라는 용어는 내가 처음보는, 상황에 맞지 않는 용어들이다. 처음에는 그런 용어도 쓰나보다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그의 다른 포스트를 보면 ‘조작이라는 말을 영문으로 하면 대충 operation쯤 될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대충 자신이 선택한 단어라는 뜻인데, 틀린것이 맞다. 그런 의미로는 거의 쓰지 않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는 manipulate 이다.
양(quantity)이라는 용어 역시 ‘급진적 생물학자’가 말하는 상황에 쓰이는 용어가 아니다. 이것역시 처음에는 내가 부족하여 이해를 못하는것인줄 알았더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듯 싶다. 양(quantity)이라는 말은 사회과학에서 통계를 사용하면서도 아주 많이 쓰이는 용어다. 따라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구분짓는데에 양(quantity)라는 용어를 쓰는것은 틀리지 않았다면 상당히 부적절하다 할수 있겠다.
‘급진적 생물학자’의 아마추어적인 발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GMO에 대해 쓴 다른 포스트에서는
…몇개의 유전자를 조작한 식품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의 몸에 큰 이상이 생길 일은 없을 것이라 믿어도 좋다. 적어도 프리온은 위장을 통과해 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지만, DNA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므로 안심해도 좋다. 또 유전자 조작을 통해 작물에 심은 유전자가 프리온 단백질의 특성을 가진 것도 아님으로 안심해도 좋다…
라고 하고 있는데, 정말 ‘급진적 생물학자’가 생물학자가 맞고 옳은 과학자라면 저런 글을 쓰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리온은 단백질이고 DNA는 Acid. 산이다. 그것 두개의 ‘작동’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고, 정작 GMO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것은 조작된 유전자(DNA)를 섭취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작된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정체불명의 단백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듯 하다. 그리고 그가 옳은 과학자라면 프리온의 특성을 가진 단백질이 없다고 해서 안전하다 단정할수도 없었을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것에 길들여진 자연과학자는 “임시 연습장”의 포스트에 잘 나와 있듯이 ‘우리가 잘못봤을 수도 있고, 우리의 설명 프레임이 틀렸을 수도 있다’라는 겸손을 보일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정적으로 ‘안심해도 좋다’라는 말을 꺼리낌 없이 한다는 것은 ‘급진적 생물학자’의 과학자적인 자질이 의심되는 부분이라 하지 않을수 없을것 같다.
얼마전 NYTimes에 재미있는 Essay가 실렸다. 에세이를 읽어보면, ‘민주주의 없이는 과학이 없고, 과학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정치적인 과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급진적인 생물학자’의 여러가지 포스트를 보면서 나는 적어도 그의 머리속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래서 그에게 과학이 없는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는 앞서 말했다 시피 그에게서 과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 판단도, “임시 연습장”의 포스트가 지적하고 있는 그대로 우리나라 이공계에는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급진적 생물학자’의 글을 가만히 읽고 있자면, 자신의 유식을 떠벌리고 싶어 안달한 나머지 장황하고 거만한 그리고 일방적인 설교를 하는 그 앞에서 틀린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설교를 듣고 있을 하급자?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말빨’이 좋은 사람 모두가 다 나쁘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급진적 생물학자’는 ‘빈깡통이 요란하다’는 그 말이 아주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래디컬 바이올로지”라는 항목아래 생물학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을 잔뜩 쌓아놓은 그를 보고 있자면 웬지 내 가슴이 답답해 지는것만 같다.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
나는 소셜 네트워킹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그래서 나는 그 흔한 싸이월드 홈페이지도 다 닫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폐쇄 해둔지 오래며, Facebook 과 같은 서비스도 이용하지 않는다. 메신져도 사용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로지 이메일, 전화 그리고 직접 만나는 것 세가지가 전부다.
혹자는 이런 나를 보고 갑갑한 사람 또는 시대에 뒤쳐지는 사람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 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직접 만나서 의견을 나누어 본적이 없는 사람과는 (적어도 나는) 지속적으로 통할수가 없다는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상과 같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싸이월드와 같은 웹사이트를 꾸미고 일일이 찾아 다니며 ‘관리’해줘야 하는 그 노력이 나에게는 낭비로만 다가오는 것이다.
메신져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은 언젠가는 서먹서먹한 관계. 그래서 점점 대화를 시작하기도 불편한 관계가 되고 나중에는 메신져 리스트에서 삭제 하고 싶은데도 하지 못하는 그런 관계가 된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에 경험해서 잘 알고 있다. 싸이월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메신져에서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것 역시 엄청난 ‘삽질’이 아닐수 없을것이다.
NYTimes 기사에 소개된 버거킹의 마케팅은 그런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의 최후를 보여주는것만 같다. 버거킹 햄버거의 10분의 1만도 못한 의미없고 껄끄러운 관계가 그토록 많다는 것은 어찌보면 비극이다. 메신져를 켰을때 수십명의 사람이 있어도 정작 대화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은 상당히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나는 메신져에 온라인 상태가 되면 꼭 대화하는 사람만 있는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쩌다 알게되서 메신져에 추가한 사람은 보통 내가 먼저 목록에서 삭제하는 편이었는데, 상대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참 못할짓 같기도 하다는 생각. 그리고 항상 대화할 수 있는 목록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전화나 이메일 아니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니 꼭 메신져를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메신져를 버려 버리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싸이월드나 Facebook과 같은 서비스도 역시 같은 이유로 쓰지 않고 있기도 한것이다.
싸이월드는 한동안 써 보았지만, 쓰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의 ‘일촌’이나 참 사람 할짓이 아니다. 싸이월드를 써 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예의상 정기적으로 일촌들을 방문해가며 나 왔다 간다는 표시를 남기는 ‘관리’도 만만찮은 작업이다. 반대로 내가 싸이월드 홈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은근히 내 일촌에게 그러한 ‘관리’을 요구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역시 사람할짓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이 블로그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 생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예의상 이곳을 왔다갔다 하게 하는 불편을 주기 싫기 때문이다.
“Friends, Until I Delete You”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으로 묶여지는 관계가 얼마나 가볍고 약한것인지 단적으로 잘 말해주는 문구인것 같다. 실질적으로 무의미한 관계 이면서도 쉽게 지울수 없는 고통, 그리고 지우기 까지의 고민, 지우면서 느끼는 일종의 죄책감. 한편으로는 지워지는 수모? 그 모든것을 만들어내는 온라인 소셜네트워킹은 곧 거품이 빠지고 심지어는 유행이 지나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래전부터 나는 ‘친구’와 ‘알고 지내는 사람’을 구분해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친구라는 개념을 조금 특별하게 생각하는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친구란 ‘관리’가 필요없는 존재. 10년 동안 소식을 모르고 살았다가도 다시 만다면 옛날 그때처럼 반갑게 만날수 있는 그런 존재다. 친구라면 적어도 이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나를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구분지어주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나에게 ‘아는사람’일 뿐이다.
정치인과 연예인의 차이.
최근들어 하는 생각인데, 정치인과 연예인의 차이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것 같다. 연예인은 인기를 먹고 산다. 그리고 정치인은 지지도를 먹고 산다. 우리는 연예인의 인기는 지지도라고 하지 않지만 정치인의 지지도는 종종 인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 그래서 모든것이 헷갈렸나보다.
요즘 정치인은 정치를 하기 보다는 인기를 얻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국민이 하는 잘못된 행동을 보고도 그것이 옳다며 부추기기도 하고,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옳은 말도 하지 못하고 꼭꼭 숨어있기 바쁘기도 하다. 오로지 인기를 얻기위해 TV에 나오는 연예인이나 광대와 다를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정치와 정치인이 이렇게까지 타락? 해버린 것은 국민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을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의 ‘인기’만 얻으면 재선이 되는것은 문제가 없기 때문이며, 국민은 정치인의 소신이나 국회에서의 업적을 따지기 보다는, TV나 기타 매체에서 얼마나 무언가를 속시원히, 내 마음에 들게 말과 행동을 하느냐만을 따지기 때문이다. 행동하나 말하마디에 받는 순간의 느낌만으로 정치인에 대한 지지여부를 결정하는 대다수 국민들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의 대사 한마디에 심장이 녹아버리는 10대 청소년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할수 있을것 같다.
정치인과 연예인의 차이. 있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없는것 같다. 당연히 있어야 할것이 없으니 이것을 보고 정상이라 할수 있는 사람도 역시 없을듯 싶지만, 이것이 비정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것 그것이 더 비정상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