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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 – 비몽.
역시 유튜브에서.. (나는 다운로드 그런것은 하지 않는다.. -_-;; ) 김기덕 감독의 영화라는 비몽을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괜찮은 영화다. 사골 국물같이 진한 맛이 나올것 같은 느낌이 들어 두번 세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지만, 한번 보기에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임에는 분명한것 같다.
자세히 쓰자면 한없이 길어질것 같으니, 간단히 소감을 기록해두는것이 좋겠다. 내가 제대로 영화를 해석한것이 맞다면 항상 두가지 상반된 심리를 가진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흑의 달콤한 꿈은 백의 악몽이 되고 서로 필연적으로 괴로워 할수 밖에 없는것은 참 슬픈일이다. 나중에는 흑의 행동인지 백의행동인지 조차 모호해지는 그 상태. 그 모든것을 꽤나 흥미롭게 그려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비의 의미 역시 불교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만큼, 그리 여럽기만 한 영화는 아니였다는 생각이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영화의 깊이?는 상당히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영화 전반적으로는 단순히 꽤나 좋았다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영화내용의 전개가 엉망이라고 까지 하기엔 뭣하지만 역시 좋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뭐랄까…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혼자 심취해서 횡설수설 하는 느낌이랄까. 아무리 그 내용이 좋고 중요한것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말을 하고자 하는 그 사람과 같은 생각의 프레임?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전혀 알아들을수 없는, 그래서 최소한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것이 무의미 해지고 영화를 보는 시간이 시간낭비 인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이런 영화는.. 최고의 영화라 부르기에는 아마 무리가 있을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것이 의도적이였다 하더라도 나는 웬지 이런 영화를 최고라 하면 안될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물론 내가 해석한 그것이 맞다면..) 그래도 이 영화는 비교적 쉬운 영화라서 남녀가 같이 봐도 좋을것 같다. 아마도 내가 사귀는 여자가 이 영화를 보고 ‘뭐야.. 하나도 모르겠네..’ 하면 약간은 실망할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결론은 한번쯤은 볼만한, 그래서 남에게 조심스레 추천해줄 만한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 미인도.
물론 돈내고 보지 않았으니 나도 저작권 위반에 대한 ‘공범’으로 몰릴수도 있겠지만, 얼마전 유튜브에 업로드된 영화 미인도와 음란서생을 감상? 시청? 했다.
영화를 보기전 예상했던 것은 미인도 보다는 음란서생이 조금더 선정적이지 않을까, 음란서생 보다는 미인도가 작품성이 조금더 낫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음란서생은 제목 부터가 음란스러우니 지금 생각해도 그런 예상은 할만도 했다 싶다.
그런데 영화는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과 판단이겠지만, 음란서생이 덜 선정적이었으며 음란서생이 더 작품성 있어 보였다. 미인도는 무료한 시간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도 추천하고 싶지 않을만큼 실망스러웠다.
음란서생은 코미디는 물론 등장인물의 갈등과 심리를 잘 묘사한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복잡한 정쟁과 파벌싸움에 지쳐하던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찾은 최후의 정신적 탈출구가 당시 금지되었던 음란소설이라 한다면 어느정도의 연민과 이해를 구할수 있지 않을까? 혼란스러운 정쟁에서 벗어나는 대신, 음란소설에 몰입한 나머지 그가 가진 거의 모든것을 버려버리는 그를 보면서 적어도 나는 그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수가 없었고, 음란 소설을 쓰는 그가 미워보이지만은 않았다. 다만 그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세상이 답답할 뿐이었다.
반면 미인도에서는 그러한 깊이를 찾아볼수 없었다. 돌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보는것과 같았다. 흐르는 물줄기는 있지만, 강물이나 바다를 바라볼때 느끼는, 그 흐르는 물줄기 속에 무엇인가가 있을것 같다는 기대나, 그 흐름 속에 담겨져 있을 무언가를 가늠해 볼수 있는 구석은 찾아볼수 없었다. 영화는 사건과 사건을 연이어 흘려 내 보내기만 할 뿐이었다.
깊이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피상적인 장면들은 유난히 많았었던 것같다. 확실히 음란서생이나 다른 일반적인 영화 보다는 많았으니 말이다. 유튜브에 업로드 된 동영상에서는 가려져 있었지만, 도대체 그와같은 장면이 영화에 꼭 필요한지 의문스럽지 않을수가 없었다. 영화 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본따서 ‘이것을 외설적으로 본다면 당신은 그림/예술을 모르는 사람. 또는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핑계를 대고 있는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화나 이야기 진행에 꼭 필요했던 요소가 아니였던만큼, 그것들은 사람들의 눈요깃거리를 중간중간에 넣어둔것. 영화 수익을 올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면이라고 밖에는 이해할수 없을것 같다.
미인도를 보고나서 단 한가지 칭찬하고픈 것이 있다면, 그림에 그려진 그 장면들을 재현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것은 넉넉한 제작비가 있다면 어느 감독이나 다 해낼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을까? 깊이도 없는 영화가 몇몇 재현 장면을 제외하고는 볼만한 것은 없다 싶을 정도였으니 감독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돈이 많지만 품위 없는 사람을 졸부라 하듯, 돈은 많이 쓴것 같으나 품위 없고 가치 없는 졸작을 만들어 놓았다고 할수 밖에 없을듯 싶다.
이런 악평이 지난 여름 김민선이라는 배우의 ‘청산가리’ 발언에 영향을 받은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영화 미인도는 단순히 좋지 않은 영화가 아니라 거의 시간낭비 수준의 영화였던것 같다. 아무리 공정을 기해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작년 그 ‘청산가리’ 발언이 아니였다 하더라도 나라면 영화 미인도를 보느니 차라리 대사 한줄 없는 포르노 영화를 보는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뿐이니 이것은 내가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것이거나, 아니면 영화가 정말 졸작이거나 그 둘중 하나가 정답이 아닐까 싶다.
건담.
건담은 로보트 전쟁 만화다. 그런데도 내가 이 건담이라는 만화에 빠지는 이유는 로보트 태권 V와 같은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담 시드도 역시 그러했고, 건담 00도 역시 오늘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할 거리를 던저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건담 00 두번째 시즌 16번째 에피소드를 보면서 새로 바뀐 엔딩을 보게 되었다. Yuna Ito라는 노래 정말 잘부르는 가수가 부르는 정말 좋은 노래 Trust You외에, 비극으로 끝날것만 같은 건담 00를 발견했다. 16화 제목이 비극의 전주곡이기는 했지만, 건담 00의 결말이 비극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였을까, 상당히 씁쓸했다.
그러고 보니, 건담 00는 비극으로 가는 길을 하나씩 착실히 만들어 오고 있었던것이 아닌가 싶다. 건담 시드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것으로 끝이 났는데, 아마 그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부단히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절친한 친구인 Kira와 Athran은 서로 자기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싸우다가 서로를 죽이려 하기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과거에 연연해 싸우는것은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건담 00에서는 여태껏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던것 같다.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혀서 싸우는것은 의미없다는 말, 아무리 싸워도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는 말, 그리고 그렇게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혀서 미래마저 파괴시켜버리고 마는것이 진정 원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건담 00에서는 서로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서로 싸워 이기려고만 한것이 사실이었다. 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상대를 제압하려 했고, 상대는 매번 더 강력한 신형 무기로 맞서기만 했다.
나는 Kujo(Sumeragi)와 Kati의 과거를 알고난 뒤로 그들이 과거를 되풀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아군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그것을 모른채 전쟁을 해버린 과거의 실수를 또다시 재현하고 있는듯 해서 아직까지도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건담00 에는 건담 시드에 등장했던 Lacus와 같은 인물이 없다는것이 안타깝다. Kujo나 Kati나 그들이 정작 바라는것은 전쟁이 아닌데도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없어 어느 하나가 쓰러질때까지 끝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을 없애고자 했던 Aeolia Schenberg의 계획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건담이라는 막강한 무력을 이용해 전쟁을 없애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전쟁으로 전쟁을 없애겠다는 것이기에 받아들이기가 힘든것이었다. 힘으로 제압하려 했던만큼 상대는 그만큼 힘을 키워갔고, 또다시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하는 악순환만이 반복됐다.
Ribbons의 계획은 무엇일까? Aeolia Schenberg의 계획을 유일하게 알고 있을것만 같은 Ribbons는 왜 Aeolia를 제거했을까? 계속해서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더욱더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것 보다, Ribbons의 계획대로 하나의 강력한 세력만이 존재하게 되면 전쟁이라는것이 없어질까? 어떻게 보면 건담을 만들어내서 상대를 제압하려 했던 Aeolia가 원했던것도 그것이 아니였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Ribbons가 Aeolia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튼,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가지 의문점은 많지만 한가지 분명한점은 서로 각자의 꿈과 이상, Kira가 말했던것 처럼 나쁘게 말하면 욕망 만을 쫓을 뿐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거나, 지금과 같이 싸우기만 한다면 미래가 어떻게 될것인지 생각하려는 노력이 없다는것이 조금씩 비극을 만들어 온 주요 요소가 아닐까 싶다.
친부모를 제손으로 총살 시키기까지 했던 만큼, 한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싸운다는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Setuna 자신이 더 잘 알면서, 아직까지 ‘distortion in the world’를 찾지도 못한채 계속해서 의미없는 전쟁만을 하고 있으니, 그리고 그것을 멈춰줄 사람도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미래를 파괴시키기만 하는 그런 의미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렇게도 힘든 일일까.
건담.
Gundam 00 Season 2 Episode 14이 드디어 유튜브에 올라왔다. 물론 저작권을 멋지게 위반하는 경우가 되겠지만, 요즘 건담을 챙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나이?에 내가 로보트 만화.. 그것도 일본 만화에 이렇게 빠지리라는 것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싶지만, 아무튼 재밌다….
Gundam 00 덕분에, Gundam Seed, Gundam Seed Destiny까지 다 봐 버렸는데, Seed는 선명한 그림, 그리고 여러가지 자잘한 효과음과 instrumental 배경음악만 제외한다면 00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잘 만든 수작인것 같다. 00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아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지만, 그림이나 배경음악 만큼은 정말 수준급이다. (이번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노래는 별로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배경음악을 만든사람도 만든사람이지만, 적절한 시기에 배경음악을 삽입하는 감독 역시 대단한 사람인것 같다. 덕분에 00는 보고 있다 보면, 만화를 본다기 보다는 영화를 보고 있는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데, 생각해보면 지난 에피소드 (S2E13)를 손에 땀을 쥐며 볼수 있었던 것도 배경음악 덕분이 아니였나 싶다.
Seed에서의 Freedom을 보면서, 그리고 00의 GN-Drive 시스템을 보면서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려다가 없어지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게 없을까 하는 생각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SF에 그동안 참 무관심 했던것 같다. 일본이 Freedom이나 GN-Drive를 갖춘 00 를 만들고 있을동안 우리는 ‘우리에게는 태권 V가 있다, 마징가 Z야 덤벼라..’하며 혼자 놀고 있은 꼴이니, 조금은 부끄럽기 까지 하다. 아무리 태권 V가 독도를 지킨다고 해도, Freedom 한대면 태권 V열대라도 1,2분안에 끝장을 낼텐데 도대체 우리는 뭘 하고 있었을까?
아무튼, 이제 나는 Gundam Seed, Gundam Seed Destiny의 팬이 되어버렸다. 다읍에 시간이 나면 전 에피소드를 또한번, 그리고 또 한번더.. 장면과 대사를 거의다 외워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틈틈히 보게 될것이라는 뜻인데, 정말 Seed는 내가 여태껏 본 만화중.. (만화는 별로 보지도 않았지만..) 가장 잘 만든 만화인것 같다.
영화 크로싱.
다소 실망스러운 영화다. 기대를 많이 했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 감상적이고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것이 상당히 아쉬운 영화였다. 북한인권 문제와 탈북 현상은 아주 강력한 소재인데도 불구하고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바람에 크로싱은 좋은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라 부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소재만을 놓고 봤을때에는 Blood Diamond 만큼 인상적인 소재라고 생각했고 또 그만큼 기대를 했었지만, 크로싱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Blood Diamond만큼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데에는 실패한것 같다. 나는 영화 초반 북한에서의 생활을 보여줄때 정확히 몇년도의 상황을 조명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영화는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서방세계와 남한생활, 그리고 똑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북한의 생활을 대조적으로 보여주었다면 폐쇄적이고 낙후된 북한의 생활환경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더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할수 있었을것 같은 아쉬움이 남지만, 영화 초반에 보여지는 북한의 생활은 넉넉하지는 않아도 행복하기만 한 생활. 그것 뿐이었다.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미화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중국의 정책 덕분에 너무나도 힘든 탈북 과정도 역시 그 어려움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것 같다. 솔직히 100분 길이의 크로싱 보다 23분 길이의 유튜브 동영상이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더 감동적이라 할수 있을것 같다. 영화이면서도 1/4길이의 짧은 다큐멘터리 동영상보다 감동이 적었던 영화가 바로 크로싱이었다. 내가 비교하고 있는 영화인 Blood Diamond는 DVD 두장에 걸친 긴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짧은 유튜브 동영상의 경우만을 봐도 상영시간이 짧다고 해서 사실적인 내용과 감동을 다 전달할수 없는것은 아니다. 괜히 사막에서 헤메는 감상적인 장면들을 축소하는 한편 조금더 많은 사실을 전달하고, 탈북자들이 겪는 여러가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깊이있게 조명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정치적인 부분 역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브리핑이 열리는듯한 장면은 한장면만 잠시 있었을뿐 북한 외부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또 어떻게 돕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수 없었다. 솔직히 노무현 전 대통령시절 UN 북한 인권 결의안 투표에서 우리나라가 기권표를 던졌을때에 난 우리나라 정부가 미친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올바르게 시대를 조명하고자 했던 영화라면 그 모든것을 다루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원본에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봤던 100분 길이의 영화에서는 그러한 내용들이 모조리 빠져 있었다.
북한에 있는 아들과 아내를 찾기위해 브로커를 찾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괴로움과 어려움, 그리고 비용. 브로커가 대충이나마 어떠한 경로로,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지도 역시 조명되지 않았다. 그냥 브로커를 찾아내고, 브로커는 그냥 아내와 아들을 찾아내는 이야기 전개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었다.
아무튼 감독이 누구였는지도 모르겠고, 왜 이렇게 강력하고 좋은 소재를 허무하게 낭비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예고편에서 약속했던 내용과 감동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상당한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별 다섯개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별 두개도 감사히 받아야 할 영화다.
기독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몇가지.
내가 보는 기독교는 모순 덩어리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한마디 한마디는 따로 떼어놓고 보면 정말 맞는 말들이지만, 정작 그것들을 엮어 생각했을때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교회에서 매주 성경의 한구절 만을 들어 설교 하는 이유도 여러가지 구절을 엮어 놓으면 앞뒤 말이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영화 ‘밀양’에서는 내가 말하는 모순이 비교적 잘 그려져 있는것 같았다. 용서. 마음의 평온을 되찾기 위해 죄를 지은 죄인은 용서 받기를 원했고, 피해자는 죄인을 용서하기를 원했다. 영화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 된다’는 말을 했을테고, 피해자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용서 하는것이 옳다’고 말했을것이다. 물론 따로 떼어놓고 보면 상당히 요긴하고 맞는 말이다. 죄인이나 피해자나 따로 떼어놓고 보면 둘다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둘을 묶어 놓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영화의 주인공이 말하듯 ‘하나님이 용서했는데 피해자인 자신이 어떻게 더 용서를 하느냐’라는 말에 영화속의 목사나 다른 기독교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도 주제를 돌리는 엉뚱한 위로의 말대신 이런 모순을 명쾌히 풀어내 설명할수 있는 기독교인이 있을까 싶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말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문구다. 스스로 묵묵히 노력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감지하고 알아서 도와준다는 이 말은 노력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조언이다. 그런데, 교회에 가 보면 통성기도라고 하던가. 아무튼 크게 소리내서 하나님을 부르라고 하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 하기도 한다. 떡하나 더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떡을 주게 되어 있다며 간절하게 하나님을 불러야만 하나님이 내 목소리를 들을수 있다고 한다. 둘중 어느것이 맞는 말일까? 한쪽에서는 묵묵히 자기 일을 알아서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도와준다고 하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고 도움을 청해야 내 목소리를 듣고 도움을 준다고 하니 도대체 어느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전지 전능하다는 하나님이 내가 간절하고 애타게 부르고 찾지 않으면 나를 제대로 감지할수 없다는것 또한 이상해 보이기도 하고, 쓰러져 있던 사마리안이 애타게 도움을 청했기에 도움을 받았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며 기도한다. 한마디로 힘든 일이나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해달라는 말이다. 그런데,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정작 자신이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오히려 반긴다. 하나님이 자신을 요긴하게 쓰기 위해서 단련 시키는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고 방식은 힘든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큰 힘이 되지만 역시 시험에 들지 말기를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원하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요긴하게 써주기를 바란다면 삶의 매 순간순간을 시험에 들게 해서 자신을 단련시켜주기를 원해야 하는것이 옳지 않을까? 딱히 어렵거나 힘든일이 없을때에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며 기도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때에는 자신을 요긴하게 쓰기위해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위로하는 것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땜빵질이다. 사람과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급조한듯한 땜빵질의 연속이다.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 된다 라고 위로하고, 피해자에게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듯 당신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해주는 땜빵질. 물론 땜빵질이기에 그때그때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는것 같지만, 둘은 서로 앞뒤가 잘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다.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고 하고, 교회에 미친듯이 매달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소리내어 간절히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해주면 되는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진리로 가득차 있다고 한다. 그들도 잘 알고 있듯이 진리는 시간이 지나도, 상황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는 성경이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시간이나 상황이 바뀌면 아주 쉽게 말을 바꾼다. 그때그때 적절한 성경의 페이지를 펼쳐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먼저 말했던것과 뒤에 말하는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목사나 신부는 상황에 따라 성경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들어야 할지 공부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경은 진리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을수 있는 거의 모든 상황과 그때그때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수 있는 적절한 땜빵질 문구를 담고 있는 책이라 하는것이 옳을것 같다. 적어도 내가 이해할수 없는 몇가지를 명쾌히 설명해줄수 있는 기독교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박하사탕.
내가 좋아하는 몇안되는 한국 영화 중 하나다.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영화는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한번 더 보는 습관이 있는지라, 박하사탕 이 영화 역시 처음 본 그날 이후 한달 남짓 되는 기간내에 적어도 일곱 여덟번은 봤었던것 같다. 덕분에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것도 이제 최소한 사년 정도는 지나 버린것 같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 그리고 한장면 한장면이 아직도 눈과 귀에 생생하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몸을 내맏겨 살아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영호는 철저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급격히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영호는 그때마다 평범이라는 수식어를 놓치지 않았고, 어느새 박하사탕을 좋아하고 꽃 사진을 찍고 싶어하던 영호는 온데간데 없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이 그를 만들어가는 대로 몸을 내맏겨 버린 결과였다. 그의 군홧발에 박하사탕이 짓밟힌 이후 수차례 영호가 자신의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 생각했던것은 아마도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이끌어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인생이 세상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는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보고 싶어하는 영호의 마지막 갈등이 표출된때는 아마 영호가 순임과의 이별을 결정한 그날 밤이 아니었나 싶다. 술집 앞에서 미친듯이 자전거를 타던 영호. 갑자기 술집안으로 들어와 분노를 터뜨리는 영호가 부르짖는 ‘열중 쉬어’ ‘차렷’과 같은 구호는 제발 자신의 구호와 의도대로 자신의 인생이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 나는 영호의 가장 큰 실수가 순임과 헤어지기로 결정한것이라 생각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순임을 보건대, 영호의 옆에 순임이 있었다면 영호가 다시 순수함을 되찾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역시 남자는 여자를 잘 선택하고 붙잡아야 하는것 같다. -_-;;)
아무튼, 오늘 문득 내 머릿속에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혹시나 어느새 세상이 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와는 달리 나는 앞만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인생을 살지는 않겠다는 나의 목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되어 살아보고자 하는 내 의지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지 나는 종종 혼자 점검을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려야하는 영화가 바로 이 박하사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인생이 끝날 무렵 내가 본 내 인생의 주인은 과연 세상일까 아니면 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