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009
말빨 좋은사람.
인터넷이 이렇게 해서 발달한것일까. 링크를 따라 다니다 보면 끝없이 읽을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블로그 “Open Sauce“에서 “급진적 생물학자 Radical Biologist” 또다시 거기서 “임시연습장” 으로 옮겨가며 글을 읽어댔으니 말이다.
세개의 블로그 중 내 눈을 끌었던 것은 “급진적 생물학자 Radial Biologist”였다. 어떤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싶어 글을 읽어보았더니, 기대와는 다르게 별 내용은 없었다. 뭐랄까, 할 말이 많아서 길게 써 놓은것이 아니라 한두마디로 압축할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길게 써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아무튼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듯한 노력이 상당히 보이는, 그래서 복잡하게만 쓰여진 글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간단히 말해서 자연과학은 학문의 성격상 객관성(objectivity)을 확보하기 쉬운 반면 사회과학은 그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객관성을 확보할수 있기에 자연과학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을때 그것이 받아들여지기가 쉬운반면 사회과학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구나 알만한 이 사실을 애써 포장해서 말하고 있는 ‘급진적 생물학자’의 말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옳은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리학의 중력과 원심력, 그리고 그 유명한 (미)생물학?의 파일로리균의 발견은 자연과학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프레임 뒤집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이 아닌 언어학 분야를 보면 아기의 언어 습득과정에 대한 스키너의 주장을 뒤집어 엎은 촘스키의 발언은 엄청난 관심과 함께 빠르게 학계에서 받아들여졌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들기에 프레임 뒤집기가 어렵다는 ‘급진적 생물학자’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급진적 생물학자’는 용어에서도 상당히 뒤쳐지는 지식수준을 보여주고 있는데, 영문으로 말해놓은 두가지, ‘양(quantity)’과 ‘조작(operation)’이라는 용어는 내가 처음보는, 상황에 맞지 않는 용어들이다. 처음에는 그런 용어도 쓰나보다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그의 다른 포스트를 보면 ‘조작이라는 말을 영문으로 하면 대충 operation쯤 될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대충 자신이 선택한 단어라는 뜻인데, 틀린것이 맞다. 그런 의미로는 거의 쓰지 않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는 manipulate 이다.
양(quantity)이라는 용어 역시 ‘급진적 생물학자’가 말하는 상황에 쓰이는 용어가 아니다. 이것역시 처음에는 내가 부족하여 이해를 못하는것인줄 알았더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듯 싶다. 양(quantity)이라는 말은 사회과학에서 통계를 사용하면서도 아주 많이 쓰이는 용어다. 따라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구분짓는데에 양(quantity)라는 용어를 쓰는것은 틀리지 않았다면 상당히 부적절하다 할수 있겠다.
‘급진적 생물학자’의 아마추어적인 발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GMO에 대해 쓴 다른 포스트에서는
…몇개의 유전자를 조작한 식품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의 몸에 큰 이상이 생길 일은 없을 것이라 믿어도 좋다. 적어도 프리온은 위장을 통과해 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지만, DNA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므로 안심해도 좋다. 또 유전자 조작을 통해 작물에 심은 유전자가 프리온 단백질의 특성을 가진 것도 아님으로 안심해도 좋다…
라고 하고 있는데, 정말 ‘급진적 생물학자’가 생물학자가 맞고 옳은 과학자라면 저런 글을 쓰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리온은 단백질이고 DNA는 Acid. 산이다. 그것 두개의 ‘작동’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고, 정작 GMO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것은 조작된 유전자(DNA)를 섭취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작된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정체불명의 단백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듯 하다. 그리고 그가 옳은 과학자라면 프리온의 특성을 가진 단백질이 없다고 해서 안전하다 단정할수도 없었을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것에 길들여진 자연과학자는 “임시 연습장”의 포스트에 잘 나와 있듯이 ‘우리가 잘못봤을 수도 있고, 우리의 설명 프레임이 틀렸을 수도 있다’라는 겸손을 보일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정적으로 ‘안심해도 좋다’라는 말을 꺼리낌 없이 한다는 것은 ‘급진적 생물학자’의 과학자적인 자질이 의심되는 부분이라 하지 않을수 없을것 같다.
얼마전 NYTimes에 재미있는 Essay가 실렸다. 에세이를 읽어보면, ‘민주주의 없이는 과학이 없고, 과학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정치적인 과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급진적인 생물학자’의 여러가지 포스트를 보면서 나는 적어도 그의 머리속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래서 그에게 과학이 없는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는 앞서 말했다 시피 그에게서 과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 판단도, “임시 연습장”의 포스트가 지적하고 있는 그대로 우리나라 이공계에는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급진적 생물학자’의 글을 가만히 읽고 있자면, 자신의 유식을 떠벌리고 싶어 안달한 나머지 장황하고 거만한 그리고 일방적인 설교를 하는 그 앞에서 틀린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설교를 듣고 있을 하급자?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말빨’이 좋은 사람 모두가 다 나쁘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급진적 생물학자’는 ‘빈깡통이 요란하다’는 그 말이 아주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래디컬 바이올로지”라는 항목아래 생물학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을 잔뜩 쌓아놓은 그를 보고 있자면 웬지 내 가슴이 답답해 지는것만 같다.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
나는 소셜 네트워킹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그래서 나는 그 흔한 싸이월드 홈페이지도 다 닫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폐쇄 해둔지 오래며, Facebook 과 같은 서비스도 이용하지 않는다. 메신져도 사용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로지 이메일, 전화 그리고 직접 만나는 것 세가지가 전부다.
혹자는 이런 나를 보고 갑갑한 사람 또는 시대에 뒤쳐지는 사람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 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직접 만나서 의견을 나누어 본적이 없는 사람과는 (적어도 나는) 지속적으로 통할수가 없다는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상과 같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싸이월드와 같은 웹사이트를 꾸미고 일일이 찾아 다니며 ‘관리’해줘야 하는 그 노력이 나에게는 낭비로만 다가오는 것이다.
메신져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은 언젠가는 서먹서먹한 관계. 그래서 점점 대화를 시작하기도 불편한 관계가 되고 나중에는 메신져 리스트에서 삭제 하고 싶은데도 하지 못하는 그런 관계가 된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에 경험해서 잘 알고 있다. 싸이월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메신져에서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것 역시 엄청난 ‘삽질’이 아닐수 없을것이다.
NYTimes 기사에 소개된 버거킹의 마케팅은 그런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의 최후를 보여주는것만 같다. 버거킹 햄버거의 10분의 1만도 못한 의미없고 껄끄러운 관계가 그토록 많다는 것은 어찌보면 비극이다. 메신져를 켰을때 수십명의 사람이 있어도 정작 대화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은 상당히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나는 메신져에 온라인 상태가 되면 꼭 대화하는 사람만 있는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쩌다 알게되서 메신져에 추가한 사람은 보통 내가 먼저 목록에서 삭제하는 편이었는데, 상대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참 못할짓 같기도 하다는 생각. 그리고 항상 대화할 수 있는 목록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전화나 이메일 아니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니 꼭 메신져를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메신져를 버려 버리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싸이월드나 Facebook과 같은 서비스도 역시 같은 이유로 쓰지 않고 있기도 한것이다.
싸이월드는 한동안 써 보았지만, 쓰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의 ‘일촌’이나 참 사람 할짓이 아니다. 싸이월드를 써 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예의상 정기적으로 일촌들을 방문해가며 나 왔다 간다는 표시를 남기는 ‘관리’도 만만찮은 작업이다. 반대로 내가 싸이월드 홈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은근히 내 일촌에게 그러한 ‘관리’을 요구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역시 사람할짓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이 블로그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 생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예의상 이곳을 왔다갔다 하게 하는 불편을 주기 싫기 때문이다.
“Friends, Until I Delete You”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으로 묶여지는 관계가 얼마나 가볍고 약한것인지 단적으로 잘 말해주는 문구인것 같다. 실질적으로 무의미한 관계 이면서도 쉽게 지울수 없는 고통, 그리고 지우기 까지의 고민, 지우면서 느끼는 일종의 죄책감. 한편으로는 지워지는 수모? 그 모든것을 만들어내는 온라인 소셜네트워킹은 곧 거품이 빠지고 심지어는 유행이 지나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래전부터 나는 ‘친구’와 ‘알고 지내는 사람’을 구분해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친구라는 개념을 조금 특별하게 생각하는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친구란 ‘관리’가 필요없는 존재. 10년 동안 소식을 모르고 살았다가도 다시 만다면 옛날 그때처럼 반갑게 만날수 있는 그런 존재다. 친구라면 적어도 이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나를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구분지어주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나에게 ‘아는사람’일 뿐이다.
정치인과 연예인의 차이.
최근들어 하는 생각인데, 정치인과 연예인의 차이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것 같다. 연예인은 인기를 먹고 산다. 그리고 정치인은 지지도를 먹고 산다. 우리는 연예인의 인기는 지지도라고 하지 않지만 정치인의 지지도는 종종 인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 그래서 모든것이 헷갈렸나보다.
요즘 정치인은 정치를 하기 보다는 인기를 얻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국민이 하는 잘못된 행동을 보고도 그것이 옳다며 부추기기도 하고,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옳은 말도 하지 못하고 꼭꼭 숨어있기 바쁘기도 하다. 오로지 인기를 얻기위해 TV에 나오는 연예인이나 광대와 다를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정치와 정치인이 이렇게까지 타락? 해버린 것은 국민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을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의 ‘인기’만 얻으면 재선이 되는것은 문제가 없기 때문이며, 국민은 정치인의 소신이나 국회에서의 업적을 따지기 보다는, TV나 기타 매체에서 얼마나 무언가를 속시원히, 내 마음에 들게 말과 행동을 하느냐만을 따지기 때문이다. 행동하나 말하마디에 받는 순간의 느낌만으로 정치인에 대한 지지여부를 결정하는 대다수 국민들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의 대사 한마디에 심장이 녹아버리는 10대 청소년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할수 있을것 같다.
정치인과 연예인의 차이. 있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없는것 같다. 당연히 있어야 할것이 없으니 이것을 보고 정상이라 할수 있는 사람도 역시 없을듯 싶지만, 이것이 비정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것 그것이 더 비정상이 아닌가 싶다.
조선일보: 살인범 얼굴 공개.
조선일보가 연쇄 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했다. 분명 여러 인권 단체에서는 이것을 놓고 가만히 있지 않을것 같다. 경찰이 사진을 제공한것이라면 경찰을 문책하라 할것이고, 조선일보도 역시 인권단체로부터 고소당할것이 거의 뻔해 보인다. 재판을 통해 이번 조선일보가 취한 결정의 옳고 그름이 가려지겠지만, 일단 나는 조선일보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연쇄 살인범, 그것도 스스로 범행을 자백한 연쇄 살인범의 얼굴을 ‘보호’한다는 것은 386세대 특유의 ‘현실을 놓치는 이상주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쇄 살인범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험상궂은 범인의 얼굴을 떠올릴것이다.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는듯한 강한 인상과 무서운 눈빛을 떠올릴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은 그와는 정 반대라서 더 소름끼치고 무섭다. 그의 얼굴은 그 어디를 봐도 악랄한 구석은 없어보이는 순한 인상이다. 게다가 동물을 사랑하는 듯한 그 포즈며 웃음까지, 맞선 주선자가 맞선을 성사시키기 위해 보여줄법한 프로필 사진과도 같은 사진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들도 없을것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람들은 외모로 상대의 거의 모든것을 판단한다. 재산과 학력 그리고 심지어는 성격과 인간성까지. 사진을 보면서 ‘좀 살게 생겼다’ ‘똑똑하게 생겼다’ ‘착하게 생겼다’라는 말은 괜히 하는것이 아닌것이다.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일 경우 일단 외모나 직업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먼저 파악하고자 하는것은 심리학적으로도 잘 연구된 결과다.
도저히 살인범일것 같아 보이지 않는 그가 정작 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외모를 바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것을 비난하고자 하는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외모로는 사람을 판단할수 없다는것.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판단을 가져올수도 있다는것을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선하게 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 해서 ‘에이 설마’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 그것이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피해자를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권을 보호하자는 주장의 취지는 잘 알고 있다. 재판을 하고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는 섣불리 ‘살인자’라 부르기 보다는 ‘살인 용의자’로 불러야 한다는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이상을 위해 이와 같은 범죄를 예방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포기하자는 것이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목적인지 되묻고 싶다. 누구든 사람은 인격체로서의 권리를 보호받아야 한다지만, 그러한 이상만 쫓다가는 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인권을 지켜야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들이 잘 알고 있다면 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 반대할수만은 없을것이라 생각된다.
추가: 중앙일보에서도 공개를 했다 한다. 흔히들 조중동이라 하는 세개의 신문사 중 동아일보를 제외한 두개의 신문사에서 얼굴을 공개했는데, 동아일보 까지 공개를 했다면 사람들의 움직임이 참 볼만했을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조금 더 추가: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며 말하는 사람들의 글을 몇 읽어보니, 그들은 이번 얼굴 공개가 단순한 화풀이 또는 궁금증 해소 때문이라 여기는 것 같다. 그들의 생각은 짧아서 공익의 목적이란 범죄자에 의한 재범을 방지한다는 그것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범죄자도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국민들에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 ‘설마’라는 생각에 범죄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하는것이야 말로 공익을 위하는 일임을 그들은 정말 모르고 있는것일까?
‘화풀이 식으로 얼굴을 공개하기 보다는 범죄의 원인을 찾고 범죄의 재발을 막는것이 중요하다’며 말하는 그들은 어째서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야 말로 범죄의 원인중 하나를 미연에 방지하고, 범죄의 재발을 막는 최선의 방법임을 모르는 것일까?
정말 모르고 있는것이라면 그들은 논리적이고 똑똑한척 하지만 정작 알고보면 알맹이없는 그런 바보중 한명일수 밖에 없을듯 싶다. 사람들도 역시 그들을 대할때 조금 더 정확히 말해줬으면 싶다. 웬만큼 말해서는 정신차릴 바보들은 아닌듯 하니 말이다.
추가 포스트: 범죄자 또는 범죄 용의자와 인권.
실크로드: 길만 닦으면 뭐하나..
요즘 조선일보에 연재? 되는 낡은386은 가라. 2030 실크세대가 나간다에 따르면 나도 실크세대라 한다. 실크세대. 도대체 뭐가 그리 부드럽고 고급스러워서 실크라 하는지.. 실크가 아니라 자꾸만 실버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튼, 웬지 나는 빠지고 싶다. 무슨무슨 세대라며 이름 붙이는 그것 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386세대는 가란다. 뭐, 나도 386세대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후세대 인물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386세대는 가라”라고 말하는것은 별 듣기 좋은 문구는 아닌것 같다. 기성세대를 내쫓는듯한 그 모습이 너무나도 정확히 386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실크세대가 쓰는 연재 기사를 봐도 어쩐지 내눈에는 하나같이 386스럽기만 하다. 386 그들이 해왔던 그것을 이제는 우리가 해야겠으니 비키라는 그런 말일뿐, 그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생각은 없는것 같다.
무슨, 전문성 없는 386과는 다르게 전문성을 익혀야 하느니 뭐니 말은 많지만, 386세대 역시 ‘전문성’을 무기로 하긴 했었다. 알맹이는 없었다 생각하지만, 386이라는 말 뜻에서부터 알수 있듯이, 그들은 전문성을 ‘학벌’이라는 것으로 가늠했을 뿐, 나름대로 그들 스스로 ‘전문가 시스템?’은 갖추고 있었다. 뭐.. 학벌을 위조해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어차피 다 알맹이가 없었으니 그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연재되는 글이 상당히 386 스럽다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386 스럽게 뜬구름만 잡고 있다는것이다. 내가 386을 싫어하는 이유중 하나가 이상에 젖어서 뜬구름만 잡다가 현실을 놓친다는 것이고, 또 그것을 잘못됐다고 조차 생각하지 못하는것인지 않는것인지 아무튼 그렇다는 것인데, 연재되는 글을 기고하는 실크세대라는 사람들 역시 그런 면에서 386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보고 배운것이라면 상당히 잘 배운것이라 할만큼 말이다.
무슨 CEO모임이니, 경영학 석사니 하는 사람이 나와서 하는 말은 이런 정책, 저런 정책, 그리고 예산을 써서 어떻게 저떻게 실크로드 길을 닦는게 중요하다는데.. 나는 도대체 그 실크로드를 왔다갔다 하면서 뭘 사고 팔자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고생고생 해가며 굶어가며 성공을 이뤄냈지만, 이제는 그럴 사람이 없기에 실크로드를 다니기 편하게 잘 닦아야 한다는데, 옛날과는 다르게 이제는 도대체 그 실크로드 위를 다니며 팔 상품이 없다.
옛날에는 그나마 값싼 노동력으로 가발과 신발 등 우리는 팔것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고생하기 싫다며 길만 잘 닦아달라 할 뿐, 그리고 편안히 앉아서 ‘관리’만 하려고 할 뿐, 실제로 상품을 만들겠다는 인력, 상품을 만들수 있는 인력은 없는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창업이니 뭐니.. 도대체 뜬구름만 잡고 있으니 정말 386 스럽다 하지 않을수가 없는것이다.
광물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면 생산적인 두뇌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같이 편한일만 하겠다 하니, 이공계는 다들 알다시피 찬밥 신세가 된지 오래다. 덕분에 이제는 창업지원금이 불어나서 창업은 쉬워지고 젊은이들이 창업에 대한 도전정신을 가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무슨 기술을 가지고 창업을 해야하는지 그것이 문제다.
386이 일으켰던 벤쳐 거품이 무너진것은 경쟁력없는 기술만을 믿고 너도나도 창업을 해댔기 때문인데, 이대로라면 실크세대라는 그들 역시 똑같은 실수를 할것은 뻔하다. 아무리 실크로드를 왕복 8차선 아스팔트 고속도로로 포장공사를 해 놓아도, 사고 팔아야 할 상품이 전무하거나 시원찮으면 길 닦는데에 시간과 돈만 낭비할뿐 모두 거품이 되어 돌아올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탈북자 문제.
어제 NPR에서 간단하게나마 소개된 내용은, 탈북자들의 탈북경로를 따라 취재한 National Geographic 기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었다. 물론, NG 2월호에 그가 촬영한 사진과 기사가 실릴것이라 한다. 여러가지 탈북의 어려움과 탈북의 방법, 그리고 경로는 이미 익히 들어서 아는 것 그대로였지만, 마지막에 그가 하는 말 만큼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것 같았다.
쉽게 지나칠수 없는 그의 말은,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게 되면 ‘아이러니 하게도’ 북에 다시 가봤으면 하는 향수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언뜻 들어 넘기기에는 당연히 북에 두고온 가족들 덕분에 향수병으로 괴로워 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는 그만큼 한국 사회가 탈북자들을 따듯하게 대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향수병에 고통받는것이 아닌가 라고 말하고 있다.
군생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탈북자나 조선족을 가장해 투입되는 대남간첩이 적지 않을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래서 나는 조선족이나 탈북자를 받아들일때에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만을 해왔는데, NG기자의 말을 듣고 보니 국내에 받아들인 탈북자들을 조금더 잘 돌봐주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딱히 공산주의 사상에 신물이 나서 탈북한것이 아니라, 식량난 때문에 탈북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것 같다. 그런 그들이 정작 한국에 와서도 생활고를 겪게 될때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옛날이 그립고, 잠시나마 그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지만 정작 내가,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가,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는것 같다. 한국에까지 와서도 생활고를 겪게 됐을때, 그들이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을 키우게 된다면 어찌할것인가 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걷잡을수 없지 않을까? 특히나 겉으로 보기에는 탈북자 출신인지 전혀 알수 없는 경우에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을까?
아무튼, 애써 보듬어 안은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둔갑시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자들이 떵떵거리며 살도록 특혜를 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탈북해서 남한으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 그리고 다시는 지옥같은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 정도는 하게 해줘야 옳은것이 아닐까?
NPR기사와 NG에 실릴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만약 탈북자라면 한국행이 아니라 미국행을 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여론.
역시 재미있는 연합뉴스 기사가 또 있다. 경찰 게시판에서 ‘여론’을 돌려 놓자며 인터넷에서 진행하는 여러가지 여론 조사 투표를 독려 한다는 내용, 또 그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다.
상당히 재밌다. 이제 경찰도 열 받을만큼 열을 받았나 보다. 그야말로 이런 ‘찌질한’ 행동까지 하는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찌질한’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경찰을 미워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촛불 시위는 좋아하고 현 정부나 경찰과 같은 공권력, 그리고 공무원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그 사람들이 하는 표현 그대로 옮겨보고 싶어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러한 ‘찌질함’의 원천은 지금 경찰을 싫어하고 비웃는 그들이 아니였던가? ‘다음(daum) 서명운동에 동참하라’며 아고라 게시판이며 인터넷 포털 각 카페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도배하다시피 해서 ‘여론’을 형성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 경찰이 하는 그 ‘찌질한 행동’을 몸소 가르쳐준 스승이 바로 그들이 아니였는가 말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쪽이 우세한 사안에 대한 인터넷 여론조사나 투표 결과는 ‘여론’이고, 이번 경찰들의 움직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수 없을 인터넷 여론조사/투표결과는 ‘조작된 여론’이라고 우겨댈 셈인지 참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다. 정말, 내가 하면 러브스토리, 남이 하면 불륜이라 주장하는 그런 뻔뻔한짓을 할지 상당히 궁금하다.
내가 누누히 말해왔던 대로 ‘정보화 시대의 바보’들은 인터넷 여론 조사나 투표따위를 믿기 때문에 할수 없는것이라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경찰이 이렇게까지 된것, 그리고 또 현실적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 씁쓸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인터넷 바보들이 조금이나마 사라질까?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자각이나 하고 있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지금 그들은 자신이 바보인지도 모르는, 오히려 자신이 똑똑한줄 착각하고 있는, 바보의 최상위급 상태에 있으니 갑갑하기만 하다. 해서 말인데, 이번에는 경찰이 ‘조작한 여론’이라며 떠들어대고 난 후에,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여론’은 국민의 뜻이라고 또 바락바락 우겨댈것은 거의 뻔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딱히 궁금해 할것도 없이, 예상대로 움직이는 바보들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것 같다.
추가: 한겨례. 예상했던 대로 아주 잘 해주고 있는것 같다.
딱히 골라서 보는것은 아닌데.. 네이버 홈페이지에서 각 언론사 머릿기사를 보니,
오마이뉴스 도 역시 내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다.
북한화폐 살포.
짧은 포스트가 될것이지만, 간단히 기록해둔다.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북한에 전단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이제는 북한화폐를 매달아 살포할것이라 한다.
여태껏 달러를 보낸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하필 북한 화폐를 보낼까? 이제는 북한에서 달러가 통하지 않는것인지, 이제는 달러를 바꾸려고 하면 전단지를 읽은것으로 판단해서 처벌을 받는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된것인지는 모르겠다. 설명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기사에는 그런말이 도통없으니 조금은 답답하다.
아무튼, 기사 내용에 나온것과 같이 ‘남북 교류협력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주장이 옳은것 같아 보인다. 일방적인 살포는 교역이 아니라는 말이 상당한 일리가 있는 주장인것 같다. 물론, 북한 눈치 살피기 좋아하고 벌써부터 겁먹었을지 모를 정부, 특히 통일부,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햇볓정책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 덕분에 정작 법이 어떻게 적용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북한화폐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문득 아주 악랄한 생각이 들었다. 북한은 불과 몇년전 까지만해도 유명한 달러 위조국이었다. (지금도 열심히 위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달러를 위조해낸 경우, 그리고 그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경우는 아마 북한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해서 말인데… 전단지에 매달아 보내는 북한화폐를 어디서 돈주고 사오기보다는, 아예 위조화폐를 뿌려버리면 어떨까 하는 (역시나) 아주 악랄한 생각이 잠시 스쳤다.
아무리 경제활동이 미미한 국가라고는 하지만, 쉽게 구분할수 없는 위조화폐가 하늘에서 마구 떨어지면 아주 폭삭 망할수 밖에 없지 않을까? 더군다나 위조화폐를 구분할수 있는 장치나 기계마저도 부족할테니 타격은 더 클것이 뻔해보인다. 정말 다시 생각해봐도 악랄한 생각은 생각이다.
북한과 교류를 트고 나서 헌법을 고쳐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 내가 들은 바로는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북한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국내에서 위조하는 것. 그것을 우리나라 정부가 나서서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것일까? 정작 북한화폐가 아닌 위조화폐이니 통일부에서 내세우는 ‘남북 교류협력법’도 적용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만약 북한화폐 위조가 우리나라에서 불법이 아니라면 그리고 아주 악랄한 방법으로 북한을 왕창 무너뜨리고 싶다면… 북한화폐를 아주 ‘대랑’으로 위조해서 뿌려버리는것이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뭐.. 물론 걔들이 열받아서 전쟁하자 할수도 있는 노릇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전쟁이 무서운것은 아니지만, 낮이 좀 간지러울것 같긴 하다..
항-사랑의 묘약?
그럴때가 있다. 사람의 생각과 의지가 일치하지 않는때. 의지로는 생각을 움직일수 없어서 고통받는때. 생각만으로는 강력한 의지를 만들어낼 수가 없을때. 그럴때가 있다. 그럴 ‘때’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랑병인지 상사병인지 하는 아무튼 그런것이 아닌가 싶은데, 얼마전 뉴욕타임즈에서 읽은 기사가 떠오르지 않을수가 없다. 사실 처음 기사를 읽었을때의 느낌은 희망보다는 반감과 절망이 컸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꼭 그리 반감만 가질게 아닌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는 단지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폭력과 살인이 그렇고, 무분별한 핵폭탄과 복제인간의 제조가 그렇다. 특히 후자의 것들은 과학의 발달로 인류가 얻어낸 능력인만큼 더욱더 조심히 다뤄야할 것들이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나 인간의 신체 외에 사람의 마음도 연구한다. 그래서 기사에 실린 내용 대로 이제는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할 수도, 그리고 사랑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는 세상을 눈앞에 두고 있기도 한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조절 할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핵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능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할수는 있지만 해서는 안되는 것’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어느모로 보나 그것이 무서운 능력이라는 것은 분명한것 같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생각과 의지가 따로 노는 인간이란 참 불편하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가속페달과 엔진이 서로 맞지 않아서(out of sync?)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동차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정말 신이 인간을 창조한것이 맞다면, 참으로 대충대충 만들어 놓은것 같다. 일부러 장난쳐놓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오래전 붓다가 희노애락에 대해 죽도록 고민했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사람의 의지대로 생각을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즐겁고 싶을 때 즐겁고, 화내고 싶을 때 화나고,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고, 반대로 미워하고 싶을때 마음껏 미워할 수 있으며, 공부하고 싶을때 공부생각만 할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때때로 의지가 부족해서 생각을 움직이지 못하는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듣기도 하지만, 상사병의 경우에서 알수있듯이 사람의 생각이란 의지로 조절되는 그런것은 분명 아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사람의 의지대로 생각을 조절할 수만 있다면, 생각대로 의지라는 것을 쌓아올릴수만 있다면 모든것이 상당히 편리할것 같다. 붓다가 그랬듯 애써 편편한 돌무덤을 찾아, 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인간이란 왜 이렇게 불편한 존재인가를 놓고 죽도록 고민할 필요도 없어질테니 말이다.
그러나 양날의 검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또다른 인간을 인위적으로 조종하고 지배할수 있다는것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핵 기술과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위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혜택은 꿈과 같은 축복이 아닐수 없다. 머지 않아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조절할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을때, 우리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건담.
건담은 로보트 전쟁 만화다. 그런데도 내가 이 건담이라는 만화에 빠지는 이유는 로보트 태권 V와 같은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담 시드도 역시 그러했고, 건담 00도 역시 오늘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할 거리를 던저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건담 00 두번째 시즌 16번째 에피소드를 보면서 새로 바뀐 엔딩을 보게 되었다. Yuna Ito라는 노래 정말 잘부르는 가수가 부르는 정말 좋은 노래 Trust You외에, 비극으로 끝날것만 같은 건담 00를 발견했다. 16화 제목이 비극의 전주곡이기는 했지만, 건담 00의 결말이 비극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였을까, 상당히 씁쓸했다.
그러고 보니, 건담 00는 비극으로 가는 길을 하나씩 착실히 만들어 오고 있었던것이 아닌가 싶다. 건담 시드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것으로 끝이 났는데, 아마 그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부단히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절친한 친구인 Kira와 Athran은 서로 자기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싸우다가 서로를 죽이려 하기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과거에 연연해 싸우는것은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건담 00에서는 여태껏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던것 같다.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혀서 싸우는것은 의미없다는 말, 아무리 싸워도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는 말, 그리고 그렇게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혀서 미래마저 파괴시켜버리고 마는것이 진정 원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건담 00에서는 서로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서로 싸워 이기려고만 한것이 사실이었다. 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상대를 제압하려 했고, 상대는 매번 더 강력한 신형 무기로 맞서기만 했다.
나는 Kujo(Sumeragi)와 Kati의 과거를 알고난 뒤로 그들이 과거를 되풀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아군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그것을 모른채 전쟁을 해버린 과거의 실수를 또다시 재현하고 있는듯 해서 아직까지도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건담00 에는 건담 시드에 등장했던 Lacus와 같은 인물이 없다는것이 안타깝다. Kujo나 Kati나 그들이 정작 바라는것은 전쟁이 아닌데도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없어 어느 하나가 쓰러질때까지 끝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을 없애고자 했던 Aeolia Schenberg의 계획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건담이라는 막강한 무력을 이용해 전쟁을 없애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전쟁으로 전쟁을 없애겠다는 것이기에 받아들이기가 힘든것이었다. 힘으로 제압하려 했던만큼 상대는 그만큼 힘을 키워갔고, 또다시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하는 악순환만이 반복됐다.
Ribbons의 계획은 무엇일까? Aeolia Schenberg의 계획을 유일하게 알고 있을것만 같은 Ribbons는 왜 Aeolia를 제거했을까? 계속해서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더욱더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것 보다, Ribbons의 계획대로 하나의 강력한 세력만이 존재하게 되면 전쟁이라는것이 없어질까? 어떻게 보면 건담을 만들어내서 상대를 제압하려 했던 Aeolia가 원했던것도 그것이 아니였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Ribbons가 Aeolia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튼,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가지 의문점은 많지만 한가지 분명한점은 서로 각자의 꿈과 이상, Kira가 말했던것 처럼 나쁘게 말하면 욕망 만을 쫓을 뿐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거나, 지금과 같이 싸우기만 한다면 미래가 어떻게 될것인지 생각하려는 노력이 없다는것이 조금씩 비극을 만들어 온 주요 요소가 아닐까 싶다.
친부모를 제손으로 총살 시키기까지 했던 만큼, 한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싸운다는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Setuna 자신이 더 잘 알면서, 아직까지 ‘distortion in the world’를 찾지도 못한채 계속해서 의미없는 전쟁만을 하고 있으니, 그리고 그것을 멈춰줄 사람도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미래를 파괴시키기만 하는 그런 의미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렇게도 힘든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