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2008
박하사탕.
내가 좋아하는 몇안되는 한국 영화 중 하나다.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영화는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한번 더 보는 습관이 있는지라, 박하사탕 이 영화 역시 처음 본 그날 이후 한달 남짓 되는 기간내에 적어도 일곱 여덟번은 봤었던것 같다. 덕분에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것도 이제 최소한 사년 정도는 지나 버린것 같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 그리고 한장면 한장면이 아직도 눈과 귀에 생생하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몸을 내맏겨 살아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영호는 철저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급격히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영호는 그때마다 평범이라는 수식어를 놓치지 않았고, 어느새 박하사탕을 좋아하고 꽃 사진을 찍고 싶어하던 영호는 온데간데 없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이 그를 만들어가는 대로 몸을 내맏겨 버린 결과였다. 그의 군홧발에 박하사탕이 짓밟힌 이후 수차례 영호가 자신의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 생각했던것은 아마도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이끌어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인생이 세상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는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보고 싶어하는 영호의 마지막 갈등이 표출된때는 아마 영호가 순임과의 이별을 결정한 그날 밤이 아니었나 싶다. 술집 앞에서 미친듯이 자전거를 타던 영호. 갑자기 술집안으로 들어와 분노를 터뜨리는 영호가 부르짖는 ‘열중 쉬어’ ‘차렷’과 같은 구호는 제발 자신의 구호와 의도대로 자신의 인생이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 나는 영호의 가장 큰 실수가 순임과 헤어지기로 결정한것이라 생각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순임을 보건대, 영호의 옆에 순임이 있었다면 영호가 다시 순수함을 되찾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역시 남자는 여자를 잘 선택하고 붙잡아야 하는것 같다. -_-;;)
아무튼, 오늘 문득 내 머릿속에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혹시나 어느새 세상이 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와는 달리 나는 앞만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인생을 살지는 않겠다는 나의 목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되어 살아보고자 하는 내 의지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지 나는 종종 혼자 점검을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려야하는 영화가 바로 이 박하사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인생이 끝날 무렵 내가 본 내 인생의 주인은 과연 세상일까 아니면 나일까?
뒤로 가는것인가?
인류 역사에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것은 하나의 큰 획을 긋는다. 뭐.. 인류학이나 그런것을 전공하는것은 아니지만, 오래전에 읽은 책의 내용을 지금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것이 맞다면 그렇다. 아무튼, 그렇게 분리되었던 종교와 정치가 요즘 내가 느끼기에는 다시 하나로 통합되려 하는것 같다. 옛날에 비해 종교인과 정치인을 대하는 태도에 점점 차이가 없어지고 있고, 정치역시 종교적인 문제를 크게 다루고 있다 느끼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사상이 옳고 그름을 떠나, 국내 사정을 보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른바 ‘노사모’라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구체적인 정책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기 보다는 노 전 대통령이 가진 생각을 여과없이 모두 받아들이는 형태다. 정치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특정 정치인이 가진 생각에 동의 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노사모’는 노 전대통령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따른다는점에서 종교지도자를 따르는 신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미국 대선에 당선된 오바마 역시 자신이 내세운 정책덕분에 당선되기도 했겠지만, 특히나 흑인교회에서 설교하는듯한 연설에 홀린? 많은 미국인들이 그를 위해 투표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것 같다.
이렇듯 사람들이 정치인과 종교지도자를 대하는 태도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도 하지만, 정치 역시 점점 종교적인 문제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종교적인 문제를 발단으로 시작된 분쟁과 테러에 전세계가 시달리고 있고, 이러한 문제는 단순한 종교적인 문제를 넘어 중요한 정치적인 사안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서로 다른 종교적 가르침에서 빚어진 상이한 가치관과 사상이 낳은 여러가지 형태의 갈등은 이제 중요한 정치적인 쟁점이 되어버렸고, 정치는 그렇게 제각각 서로다른 종교적인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도구로 전락해버린것이다.
오늘날 종교와 정치가 다시 하나가 되어간다는 느낌은 나만 가지고 있는것일까? 그 옛날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없었던 구석기 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길목에 들어선것만 같은 이 느낌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것 같지만, 종교와 정치의 통합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때, 지금 이 시점에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다는것. 이것이 좋은것일까 나쁜것일까?
용기.
요즘 세상을 보다 보니.. 물론 옛날에도 그랬겠지만,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것 같다. 세상에 알려진 인물들은 모두다 하나같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용기가 있다 없다를 판가름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용기는,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할수 있는 용기가 되겠다. 어릴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배우게 되는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이야기.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아끼는 나무를 손도끼로 잘라버린것을 숨기지 않고 자백?했다는 워싱턴의 이야기는 지금 내가 말하는 용기가 무엇인지 말해주기에 충분한것 같다.
요즘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 치는 시대가 되어버린것 같다. 나무를 손도끼로 잘라놓고도 화나있는 할아버지 앞에서 시치미를 딱 잡아떼거나, 오히려 누가 그랬느냐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것과 같은, 뻔뻔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정신이 좀 이상하다 해야할지 모를 그런 행동이 너무나도 보편화 되어버린것 같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그러한 욕구에 굴복하는 사람이 바로 비겁한 사람이라는것을 알고는 있는것일까? 내가 보기엔 요즘 비겁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겁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것 같다. 오히려 인간적인 본능을 따랐는데 뭐가 문제냐?라는 태도로 나오는 비겁자들도 많으니 말이다.
아무튼, 제 1단계인 잡아떼기에 실패했을때에 비겁한 사람들은 변명하거나 어디로 도망가 숨어버리기에 바쁘다. 변명에 흔히 사용되는 수법은 상당히 단순하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억지로 정당화 시키려하거나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상대방의 잘못을 (없으면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부각 시키는 방법인데, 흔히들 자주 쓰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태도가 바로 이런 종류의 비겁한 행동이다. 어린 워싱턴의 경우라면 할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는 나무를 아무런 보호장치나 푯말없이 놔뒀는지 따지는 경우가 될것 같다. 설령 할아버지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개로 따져물을 일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공격하여 자신의 잘못을 은근슬쩍 감춰보겠다는 얄팍한 수를 쓰는것이다.
비겁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또다른 방법은 자신을 약자화 시키는것이다. 자신은 약자인데 힘있고 강력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지위를 이용해 나를 괴롭히는것 아니냐는 항변을 하는 방법이다. 물론 그러하다고 한다 쳐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사라지지 않지만, 보는이로 하여금 다른곳에 시선을 돌릴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워싱턴의 경우라면 어떤것이 될까?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들통나버린 워싱턴을 벌하려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라는 지위를 이용해 나를 벌하려 하지마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경우가 될것같다. 자신이 잘못해서 벌을 받는것임에도 엉뚱한곳으로 문제의 핵심을 돌려보려는 얄팍한 수법이 되겠다.
불구덩이에 걸어들어가는 심정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결코 가볍지 않은 벌을 받을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과 상대를 속이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할수 있는 그런 용기는 이제 사라져버리고 없는것일까? 내가 세상에게 너무 대단한것을 기대하는것일까?
유치원을 다닐 때에 난 집에 있는 빨강 돼지 저금통에서 돈을 훔쳐낸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집에서는 돼지 저금통에 지폐도 같이 구겨 넣었기 때문에 난 핀셋을 이용해 지폐를 끄집어 냈는데, 정확히 얼마짜리 지폐였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한여름에 시원한것을 먹고 싶었던 내가 친구와 함께 각각 ‘쭈쭈바’ 10개를 쌓아놓고 먹을 만큼의 돈이었던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늘에서 사이좋게 ‘쭈쭈바’ 10개를 연달아 먹은 친구와 나는 공교롭게도 한여름에 감기가 들어버렸고 나의 ‘절도행각’은 감기가 든 이유를 따져묻는 어머니에 의해 만천하에 공개되고야 말았다. 엄청나게 혼났었다. ‘절도행각’ 그 자체 보다는 그것을 시치미 떼고 안했다고 말했던것에 어머니는 더 화나 하셨기 때문이다. 잘된것인지 잘못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 이후로 난 내가 잘못한것도 스스럼없이 말해버리는 버릇? 베짱? 아니면 용기? 아무튼 그런것이 생겨버렸다. 내가 벌받을 만한 일을 한것이라면 당연히 벌받는것이 옳다는 생각과 함께.
(아마 그래서 난 ‘구원’받기 위해 교회가는것도 잘 이해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옥에 갈만한 인생을 살았다면, 지옥에 가야지 뭐 별수 있나? 나쁜짓을 해놓고 그것을 어떻게 덮어보려고 노력하는 그게 정상인가? 라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어찌됐든, 나 역시도 비겁자가 되는 때가… 나는 딱히 기억하고 있지 않는것 같지만, 나 역시도 분명 비겁자일때가 있다고 믿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흔히 볼수 있는 사회지도층이나 유명인들이 조금이나마 용기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는것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꾸는것과 같은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하다.
꿀꿀이 죽을 기억하라.
식당에서 반찬 재활용을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밥/반찬 재활용. 이제서야 알았던가 싶다. 난 초등학교 다닐때부터 알고 있었던것을 이제서야 알고 분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이 참 웃기다는 생각도 잠시, 반찬 재활용이 그토록 나쁜짓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찝찝하고 세균이 득실거려 비위생적인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먹고 병에 걸리거나 죽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던가? 노상 김밥판매 할머니가 구타당했다고 했을때에 다들 ‘서민’인 할머니 편을 들었던 사람들은 노상에서 판매되는 김밥은 얼마나 비위생적인지 알고나 있었을까? 아무튼, 다들 경제가 어렵다고 난리치는 마당에 식당에서 남은 반찬을 모조리 버려야 한다는것은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반찬 재활용을 하면서도 상식 이상의 밥값을 요구하거나, 아예 상해버린 음식을 사용하는 식당은 문제가 되겠지만, 낮은 가격을 맞추기 위해서 반찬 재활용을 하는 경우라면 나는 이해할수 있을것 같다. 오래전 서울에 있는 수많은 부대찌개 음식점에서 원조 부대찌개를 만들어 파는 바람에 한동안 사람들이 화나했었던적이 있었지만, 난 값만 싸다면 원조 부대찌개든 뭐든… 내 주머니가 가벼울때마다 사 먹을 용의가 있다. 주머니가 가볍고 배고플때는 먹고 죽지 않을것으로 배를 채우는것이 제 1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생각을 못한다고 하는 말이 맞는것 같다. 난 전후세대는 아니지만 전후세대가 얼마나 힘들게 노력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냈는지 부모님께 익히들어 잘 알고 있는터라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전후 세대는 다 기억할것 같은 꿀꿀이 죽. 오늘날 부대찌개의 원조라 할수 있을것 같은 꿀꿀이죽도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배굶고 있는 노숙자에게 꿀꿀이 죽을 권한다면 반응이 어떠할까? 모르긴 해도,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음식쓰레기 끓여놓은 꿀꿀이 죽은 먹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을것 같다. 물론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무인도에 떨어진 어느 부자나라 공주가 컵이 없다는 이유로 눈앞에 있는 개울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는것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것 같다.
국밥집에 따로 국밥이라는것이 왜 있는지 아는 사람이 많을것이라 생각했지만, 반찬 재활용이 이렇게 큰 기삿거리가 되는것을 보니 모르는 사람도 많은것 같다. 국밥집에 그냥 국밥보다 비싼 따로국밥이 따로 있는 이유는, 그냥 국밥에 들어가는 밥은 재활용 밥이기 때문에 그런것이다. 하루 지난 밥이거나, 누군가가 먹다 남긴 밥이라는것이다. 그렇지만, 난 돈없을때는 담담히 따로국밥이 아닌 그냥 국밥을 시켜먹는다. 찝찝하긴 하지만 적은돈으로 배채우는것이 목적일 때에는 그정도는 감수할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은 적게 내고 싶지만 깨끗하고 좋은 음식만 먹고 싶은것은… 따로 국밥을 먹고, 그냥 국밥 값만 지불하겠다는 일종의 도둑심보가 아닐까?
열쇠
글:: 내가 우스갯 말로 종종 쇳대라고도 부르는 이것이 드디어 손쉽게 복사되는 세상이 왔나보다. 첩보영화에서나 볼수 있듯이 비누나 기타 틀에다가 형태를 찍어오는 방법으로 열쇠를 복사하는 단계를 넘어, 이제는 디지털 카메라나 캠코더로 사진을 찍는 방법으로 열쇠를 복사해낼수 있는 단계가 되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UCSD 연구팀이 개발한것이라면, RSA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기타 선진국의 첩보부에서는 이미 만들어 활용해왔다고 보는것이 맞겠지만, 이러한 기술이 이제는 민간에 소개되었다는것이 중요한것 같다.
사진만으로도 열쇠를 복사할수 있다는것이 세상에 알려진 이상,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의 복사기를 제작할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도난이 빈번한 자동차의 경우에는 이미 immoblizer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사실 자동차보다 더 보안이 철저해야 할것 같은 집열쇠는 금속조각을 가지거나, 금속조각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정교하게 잘라낼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을 열쇠가 처음 고안되었던 그 옛날에 비해 크게 변한것이 없는것 같다. 그렇지만 비닐번호 입력방식과 같이 디지털화 시키는 것은 방법이 아닌것 같다. 컴퓨터의 보급으로 인해 때때로 디지털화 시켜놓은것이 보안에 더 취약한 경우도 많거니와 비밀번호 입력방식 잠금장치는 화재에도 취약하다 하니 새로운 물리적인 보안장치가 고안되어야 할 때가 온것 같다. 기존 열쇠와 자물쇠의 방법이 아닌 또다른 형태의 물리적인 보안장치. 이것을 발명하는 사람은 돈방석이 아니라.. 아마 돈탑에 올라앉게 되지 않을까?
자살카페.
어제였다. WordPress top posts list를 둘러보다가 자살관련 블로그를 발견했다. 자살관련 블로그. 좀처럼 보기 힘든것이라.. 아니, 그보다는 처음보는것이라 살짝 둘러보았다. 포털이 제공하는 공간에 개설한것으로 보이는 자살카페로의 링크, 그리고 몇 안되는 글을 대충 둘러보면서 이번에도 역시 버릇이 되어버린것 같은 엉뚱한 생각 몇가지를 떠올려 보았다.
개인에게 자살할 권리가 주어져야 할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기목숨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그것을 막는것이 옳은일일까 아니면 잘못된것일까? 내가 둘러본 자살 블로그의 주인장 처럼, 사실 나는 개인에게 자살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꽤나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누구나 의사(자살전문의?)에게 가서 자신을 죽여달라 하고 의사는 일정한 대가를 받는대신 냉큼 ‘죽여주는’ 그런 사회를 꿈꾸지는 않는다.
충동적인 자살은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한다면 충분히 막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혼인한 남녀가 이혼하기 전에 ‘조정기간’을 거치고 ‘상담’을 받아야 하듯, 자살할 권리를 행사하는 절차 역시 여러가지 단계를 거치도록 하면 충동적인 자살은 막을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자살 하는 사람들중 자신이 비참하게 약먹고 어느 방구석에서 고꾸라져 죽거나.. 목을 매달아 죽어서 자신의 목에 아이 주먹만한 두께로 움푹파여진 ‘줄’을 그어놓고 싶어하는 사람은 흔치않다. 자살할 권리를 인정해주어서 위엄있는? (dignified??)..아무튼 깨끗한 죽음을 맞을수 있도록 해주되, 다만 충동적인 자살을 막을수 있도록 여러가지 ‘상담’과 ‘도움’의 절차를 거치도록 한다면 오히려 자살율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고통없는 편안한 죽음 뿐만 아니라, 죽음이후 자신의 육체를 비참한 상태로 남겨두고 싶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자살’을 법원이나.. 기타 기관에 신청할것이고.. 국가는 신청인이 ‘자살’의 권리를 행사하기 전에 필수적으로 ‘상담’과 ‘도움’을 받도록 함으로서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도움을 받을수 있도록 하고, 자살을 선택하기 전에 도움을 받음으로서 마음을 고쳐먹을수 있도록 돕는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도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에는 그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할것이다.
어제 자살 블로그를 둘러보면서 한가지 궁금한점이 생겼다. 오늘날 자살하고 싶다며 자살카페를 개설하거나 자살카페를 찾아 가입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떠한것일까? 어떠한 심리에서 그러한 활동을 하는지 정말궁금하다. 아마 자신들도 잘 모르고 있을 그 심리를 이미 연구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회 심리학과 나는 거리가 좀 있는 만큼 단순히 궁금해 하고 말아야 될듯 하다. 그렇지만 내가 짐작해 볼수 있는것은, 카페를 개설하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 소통하고 싶어한다는것은 스스로 자살 하고싶지 않아 하는 (마지막) 몸무림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게 되어 있는만큼, 자살할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는것은..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말정말 자살하고 싶었다면 벌써 이세상에 없어야 하는것이 맞는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는 자살할 권리를 인정해주는 정책은 사회적인 논란이 될것은 분명하지만 불치병을 가지고 있는 적지않은 사람들을 생각해 볼때에도 적극 검토해보는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오바마가 한국 대선에 출마했었다면…
그렇게도 흥미진진.. 재미나던 미국 대선도 어느새 끝나버렸다. 역시 예상했던대로 오마마의 승리로 끝난 미국 대선을 그나마 관심 가지고 지켜보면서 오바마와 같은 인물이 한국 대선에 출마했었다면 어떠했을까 잠시잠시 생각해봤다. 이모저모 생각하면서 얻은것은 다소 냉소적인 웃음과 실망이라 하면 맞을것 같다. 인종의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오바마와 같은 인재를 대한민국 국민은 알아볼수 있었을까?
먼저, 선거유세 중 오바마의 연설을 듣다 보면 특히나 교육에 관한 정책을 이야기 할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이 아무리 교육정책을 바로 써도, 제각각 가정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으면 자신의 정책은 결코 성공할수 없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고, 또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만약 한국 대선후보 또는 현재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위와 같은 발언을 했다면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나중에 누구한테 책임 전가하려고 저런 말을 하나.’ ‘자기가 정책을 바로 써서 해결을 해줘야지 도대체 무슨소리 하고 있나.’ 라는 손안대고 코풀겠다는 반응과 함께 정치인의 자질이 없다는 말부터 온갖 욕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부정적인 ‘견해’가 쏟아지지 않았을까?
오바마는 무슬림이라며 메케인이 흑색선전을 하는것에 반박하며, ‘오바마는 무슬림이 아니지만, 또 무슬림이면 어떠냐. 헌법에 의해 무슬림도 대선후보가 될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자신있고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말해줄수 있는 파월과 같은 인물이 대한민국에는 있을까? 단순한 종교의 문제를 넘어 지난 한국 대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의 출생지가 일본이다.’ ‘어머니가 일본인이다.’라는 반일감정을 이용한 흑색선전이 난무했었던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것이다. 그렇지만, 이명박 후보의 출생지는 일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일본이면 어떠하냐?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일본에서 출생했더라도 대선후보가 될수 있고, 능력에 따라 대통령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라고 꼬집어 말해주는 인사는 찾아볼수 없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 국적또한 그가 가진 대통령으로서의 자질과는 전혀 무관한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시선을 바른곳으로 이끌어주었던 이는 없었다.
위 두가지를 제외 하더라도, 오바마가 한국 대선에 출마했었다면 그가 한국인이었다 하더라도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더 있겠지만, 막대한 선거자금을 모금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나라에서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테니 말이다. 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잘못된 민주주의를 꿈꾸고 믿고있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직까지는 ‘인재’를 알아보는 변별력이 없는것 같다.
거짓말.
붉은색과 흰색 두가지 색이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누군가가 거짓말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상당히 언짢아 한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자신을 속인것에 대해 감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거짓말에 기분나빠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을 속였기 때문이라고들 말하지만 내가 볼때에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것 같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나는 이 사람을 속일수 있다’라고 생각하기에 거짓말을 한다.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잠재의식에 존재하는 생각일지라도 ‘도저히 나는 이 사람을 속일수 없다’라고 판단하는 경우에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기 때문이다. 상대를 속일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달리 말해 자신이 상대보다 한수 위, 또는 조금이나마 더 똑똑하기에 소위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가지고 놀수 있다(manipulate)는 믿음을 갖는것과 다를것이 없는것 같다.
따라서 사람들이 거짓말에 분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았다 라는 사실 보다는 상대방이 나를 하찮게 봤다, 또는 깔봤다라는 사실을 잠재의식을 통해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상대방의 거짓말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경우에는 속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를 깔보거나 하찮게 생각해서 나를 속인것이 아니라는 판단? 또는 믿음이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기분나빠 하지 않는것이 아닐까? 중요한것은 속고 속이는것에 있는것이 아니라, 속이는 사람이 속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고 또 얼마만큼 존중했느냐에 달려있는것 같다.
한글.
내 모국어라서 이런 느낌을 갖는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한글은 영어에 비해 상당히 우수한 언어다. 영어를 배우면서 가장 불만스러웠던것 그리고 아직까지도 불만스러운것은.. 딱히 ‘규칙’이라는것이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언어가 짬뽕되어 만들어진 현대 영어는 실제로 ‘문법’이라는것이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제멋대로다. 동사의 변형에서부터 문장을 짜깁기 해 내는것 까지 어떠한 공통된 규칙이 없이 제멋대로라서 하나하나 사용하면서 익숙해질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한글도 역시 그러한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적어도 영어보다는 어떠한 규칙에 의해 예측 가능한 경우가 많은 과학적인 언어임에는 틀림이 없는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요즘엔 너무 많이 보인다. 자기의 모국어인 한글인데도 말이다. 물론 나 역시도 완벽한 한글을 구사한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요즘은 학생이나 일반인이나 너도나도 인터넷에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정도의 엉터리 한글을 써대고 있는통에 한글 문법이 바뀌었나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아 상당히 불편하기도 하고 한숨나오기도 하는것이 사실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에’와 ‘의’를 구분 못하는 한글이다. 예를들어 ‘가을의 정취’를 ‘가을에 정취’라 하는것인데, 억지로 억지로 ‘가을에 (느낄수 있는) 정취’라 끼워 맞추면 그럭저럭 말이 되긴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뜻은 ‘가을의 정취’인만큼 ‘가을에 정취’는 도저히 그 뜻이 잘 맞지 않는 잘못된 한글이다.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조사의 사용이 잘못되어 글이 엉망이 되어있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에’와 ‘의’의 경우와 같이 일반적인 발음, 조금은 잘못된 발음 그대로 글을 쓰거나, ‘안된다’와 ‘않된다’의 경우와 같이 발음이 비슷하거나 같을 경우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해서 엉터리 한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요즘은 몇 손가락에 꼽히는 대표적인 신문에서도 이런 잘못된 한글을 흔하게 볼수 있는 세상이니 정말 한숨이 나오지 않을수 없는것 같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일이 일어날까?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받아쓰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서울대 신입생 또는 예비졸업생을 무작위로 50명을 뽑아 여러가지 받아쓰기를 시키면 몇점이 나올까? 정말 궁금하다. 받아쓰기도 중요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과거만큼 책다운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그만큼 글도 많이 쓰지 않는것이 가장 큰 문제인것 같다. 중고등학교때에 글을 많이 읽고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고 대학에서도 역시 글쓰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기때문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이제는 ‘선생님’이나 ‘교수’라 불리우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세대 마저도 제대로된 한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도대체 과거처럼 제대로된 한글을 사용할수 있는 세대가 다시 올수나 있을지 걱정스럽다.
다른 모든것과 같이 언어도 시간이 가면서 변해간다고 한다. 하지만 모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타나는 이런 변화는 퇴화라 불러야 할것 같다.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던 일본 이야기가 나올때면 버럭버럭 하는 사람들이 정작 한글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퇴화시키고 있다는것이 참 아이러니하다.